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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마즈 다다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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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시마즈 다다쓰네는 1576년에 태어나 1638년에 사망한 사쓰마 번의 번주이다. 그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서 활약했으며, 1598년 사천 전투에서 명나라 군을 격파하는 공을 세웠다. 1609년에는 류큐를 침공하여 점령하고 사쓰마 번의 통치 체제를 정비했다. 그는 뛰어난 군사적 능력과 정치적 수완을 발휘했지만, 가신 살해, 류큐 침공 등 권위주의적인 면모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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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마즈 다다쓰네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시마즈 다다쓰네
본명시마즈 이에히사 (島津家久)
출생1576년 11월 27일
사망1638년 4월 7일 (향년 61세)
소속"[[File:Maru juji.svg|15px]] 시마즈 씨"
"[[File:Goshichi no kiri inverted.svg|15px]] 도요토미 씨"
"[[File:Tokugawa family crest.svg|15px]] 도쿠가와 막부"
계급다이묘
어머니사이쇼도노
아버지시마즈 요시히로
재임 시작1602년
재임 종료1638년
직책시마즈 씨 당주
전임시마즈 요시히로
후임시마즈 미쓰히사
직책 1사쓰마 번주
재임 시작 11602년
재임 종료 11638년
후임 1시마즈 미쓰히사
씨족시마즈 씨
묘소가고시마현 가고시마시의 후쿠쇼지
가명요네키쿠마루 (어린 시절 이름)
다다쓰네 (처음 이름)
이에히사
별칭야하치로
사쓰마노쇼쇼 (통칭)
지겐코 (계명에서 유래된 사후 경칭)
신호소레이안코쿠히코노미코토
계명지겐인덴카신킨게쓰다이코지
관위정사위하
좌근위소장
종삼위
주나곤
오스미노카미
사쓰마노카미
무쓰노카미
섬긴 가문시마즈 요시히사
도요토미 히데요시
히데요리
도쿠가와 이에야스
히데타다
이에미쓰
부모아버지: 시마즈 요시히로
어머니: 히로세 스케무네의 양녀, 지쓰소부인
형제자매오야지
쓰루주마루
히사야스
다다쓰네
만치요마루
다다키요
오시타
정실시마즈 기주
측실시마즈 다다키요 딸
가마다 마사시게 딸
사가라 나가야스 딸
사키야마 히데모리 딸
마키 다네치카 딸
가와무라 히데마사 딸
이무라 시게하루 딸
미야하라 가게토키 딸
자녀시마즈 효고노카미
미쓰히사
다다아키라
기타고 히사나오
다다히로
마치다 다다나오
다다토모
네지 시게나가
히사오
가마다 마사카쓰
이주인 히사쿠니
다다토모
이주인 히사토모
이세 사다아키라
가바야마 히사나오
기타고 오키히사 정실
시마즈 히사요시 실
다네가시마 다다토키 실
시마즈 히사아키라 실
시마즈 히사요리 실
기모쓰키 가네야 정실
시마즈 히사시게 실
이리키인 시게요리 정실
시마즈 히사타케 실
양자조수인덴
지즈루
군사 경력
참전 전투정유재란 (1597-1598)
류큐 침공 (1609)

2. 생애

시마즈 요시히로의 셋째 아들로 태어난 시마즈 다다쓰네는 형인 시마즈 요시히사에게 아들이 없었고, 다른 형은 임진왜란조선에서 병사했기 때문에 요시히사의 뒤를 이을 후계자로 여겨졌다. 이후 ''이에히사''(家久)라는 이름을 사용했으며, 아버지와 삼촌처럼 전장에서 용맹함으로 명성을 떨쳤다.[2]

시마즈 씨족의 수장으로서 다다쓰네는 부패하거나 불충한 조언자들을 제거하고 씨족 지도부를 개혁하고자 했다. 1599년, 가로(家老)이자 오랜 가신이었던 이주인 타다무네와 그의 아들 이주인 타다자네를 살해한 것이 그 예이다.

1602년 시마즈 씨족의 수장이 되었으나, 1619년까지는 아버지 요시히로가 실권을 쥐고 있었다.

1609년 4월 5일, 류큐 왕국으로 원정군을 이끌고 가 이를 정복하여 명나라와의 무역에 영향을 미쳤다. 메이지 유신 (1868) 이후에야 일본에 정식으로 합병된 류큐는 당시 반독립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는데, 이는 중국이 류큐가 일본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을 알았다면 무역이 중단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다쓰네는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왕국에 특이한 지위를 강요했다.

2. 1. 가독 상속과 초기 활동

덴쇼 4년 (1576년)天正4年|덴쇼 4년일본어 11월 7일 (1576년11월 27일), 시마즈 요시히로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백부 시마즈 요시히사에게 아들이 없었고, 다른 형인 시마즈 히사카즈는 조선에서 병사했기 때문에, 그는 삼촌의 뒤를 이을 후계자로 여겨졌으며, 이후 ''이에히사''(家久)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아버지와 삼촌처럼 그는 전장에서 용맹함으로 명성을 떨쳤다.[2]

후계자가 되기 전에는 케마리와 주색에 빠져 지냈으며, 조선 출병 중인 요시히로로부터 서신으로 주의를 받았다. 그러나 후계자가 되자 아버지나 백부들과 마찬가지로 본래 갖춘 뛰어난 무용을 발휘했다. 게이초의 역에서는 게이초 3년 (1598년), 아버지 요시히로를 따라 8,000명의 적은 병력으로 명나라 군 수만 명을 격파하는 맹렬한 용맹을 보였다(사천 전투).[2]

에혼 다이코키에 따르면, 성에 쳐들어온 동일원이 이끄는 명나라 대군 4만여 명에 맞서 병사 1천 명을 이끌고 성 밖으로 쳐들어가 종횡무진으로 창을 찌르고 많은 명나라 병사를 베어냈다고 한다. 성을 지키던 대장 요시히로와 병사 5천 명도 기회를 틈타 성 밖으로 쳐들어가 무자비하게 돌파하여 명나라 병사 3만 명의 목을 벴다고 한다. 다만, 태도나 성격이 고쳐진 것은 아니어서, 조선의 역에서도 충항의 횡포에 시달린 잡병이 조선 측으로 도망갔다는 기록이 있다.[3]

게이초 4년 (1599년) 1월 9일, 조선에서 귀국한 충항은 고다이로로부터 사천 전투에서의 군공을 치하받아 5만 석의 가증과 사콘노쇼쇼에 임명되었다. 지금까지 "시마즈 또팔랑전"으로 가명으로 불렸지만, 이 이후 "하네다 사쓰마쇼쇼전"으로 불린다. 또한 2월 20일에는 요시히사로부터 시마즈 가문에 전해지는 중요한 보물인 "고쥬모츠" 중 "시구레 군기"가 보내져, 정식으로 시마즈 본가의 가독을 이었다.

같은 해 3월 9일, 가로 이주인 타다무네(고칸)을 교토·후시미의 시마즈 저택에서 자신의 손으로 참살했다. 조선 주둔 중에 이시다 미츠나리와 타다무네가 주도한 시마즈 가문 지배 체제에의 개입, 혹은 당주 권한 침해를, 충항은 가독 상속과 동시에 배제할 결단을 내린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타다무네는 가신인 동시에 히데요시로부터 직접 영지를 받은 고슈인슈이다. 그런 타다무네를 살해하는 것은 그와 친밀했던 미츠나리를 적으로 돌리는 것을 의미하며, 나아가 도요토미 정권에 대한 반역으로 간주될 수 있다. 따라서 왜 이 시점에서 충항이 스스로 타다무네를 살해하는 선택을 했는지는 의문이 남는다.[4] 타다무네 살해 후, 충항은 타카오 산에 칩거·근신하고 있다. 이것은 미츠나리의 의향이기도 하고, 요시히로가 미츠나리에게 숭상하여 칩거시켰다고도 한다.[5]

윤3월 4일, 미츠나리에 불만을 품은 칠장이 이시다 저택을 습격했고, 최종적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중재로 미츠나리는 은거하게 되었다. 이시다 저택 습격 다음 날인 윤3월 5일에는 충항은 타카오 산에서 후시미의 자택으로 돌아간다. 가보에서는 이것을 이에야스의 배려로 보고 있다. 미츠나리의 실각으로 충항의 죄는 없었던 것으로 되었다. 미츠나리의 실각을 알게 된 타다무네의 아들 이주인 타다마는 윤 3월 중에 국내의 쇼나이에서 반란을 일으켰다(쇼나이의 난). 충항은 이에야스의 승낙을 얻어, 국내로 귀국하여 요시히사와 함께 반란 진압을 지휘한다. 게이초 5년 (1600년), 이에야스의 중재도 있어 타다마는 시마즈 가문에 항복했고, 난은 종결되었다. 그 후, 타다마는 게이초 7년 (1602년)에 휴가국의 노지리에서 개최한 사냥 중에 충항에 의해 사살되었고, 시종들도 주살되었다.

게이초 7년 (1602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아버지 요시히로가 서군에 속했기 때문에, 강화 교섭을 하고 있던 백부 요시히사를 대신하여, 이에야스에게 사죄하기 위해 조락하여, 본령을 안도받았다.

게이초 11년 (1606년), 이에야스로부터 편휘를 받아, '''이에히사'''라고 칭했다.

2. 2. 사쓰마번 번주

1609년, 다다쓰네는 류큐 왕국을 침공하여 정복하고, 류큐를 통해 명나라와의 무역을 지속했다.[2] 가고시마성(쓰루마루성)을 축조하고 조카마치(城下町)를 정비하는 등 번의 기반을 다졌다.[2] 외성제(外城制)와 문할제(門割制)를 확립하여 번의 통치 체제를 정비했다.[2] 에도 막부에 처자를 인질로 보내 참근교대의 선례를 만들었다.

1613년, 아마미 제도를 사쓰마번의 직할지로 삼았다. 1617년, 도쿠가와 히데타다로부터 마쓰다이라 성씨를 하사받고 사쓰마노카미(薩摩守)에 임명되었다.[8] 오비 번과의 영토 분쟁(우시노토게 경계 논쟁)이 발생하여, 1675년까지 장기간 지속되었다.

2. 3. 사망

1638년 6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차남 미쓰히사가 가독을 계승하였다. 순사자(殉死者)는 9명이었다.[4]

3. 인물 및 평가

시마즈 요시히로의 셋째 아들로 태어난 다다쓰네는 아버지와 삼촌 시마즈 요시히사처럼 전장에서 용맹함으로 명성을 떨쳤다. 임진왜란정유재란에서 큰 공을 세웠으며,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가문을 보전하고 사쓰마 번의 기반을 다졌다. 1609년에는 류큐 왕국을 정벌하여 번의 세력을 확장하고 중국과의 대외 무역을 활성화했다.[9]

다다쓰네는 내정에도 힘써 번의 통치 체제를 정비하고 경제 발전을 이끌었다. 와카, 렌가, 다도를 즐겼으며, 검술은 도고 헤이쿠라에게서 배웠다.[9] 가고시마 만의 별명인 킨코만(錦江湾)이라는 명칭은 다다쓰네가 읊은 와카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사나다 노부시게(유키무라)를 "일본 제일의 병사"라고 평가한 편지를 남기기도 했다.

하지만, 다다쓰네는 가신 이주인 타다무네를 살해하는 등 가문 내 권력 투쟁 과정에서 강경한 모습을 보였다.[4] 1609년 류큐 왕국 침공은 제국주의적 침략 행위로 비판받을 수 있다. 정실 부인 가메히사와의 불화도 있었는데, 가메히사가 사망했을 때 와카를 통해 슬픔을 표현했지만, 를 세우지 않은 점 등으로 미루어 가메히사를 냉대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와카는 다르게 해석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13]

은거 중이기는 했지만 가신들에게 영향력을 미치는 숙부이자 장인인 요시히사가 생존해 있는 동안에는 측실을 두는 것을 삼갔다.[10] 하지만 1609년에 류큐 국왕 쇼 네이를 데리고 에도로 간 기회에 측실을 들이는 것에 대해 막부의 허락을 받으려 하여 성공했다.[11] 1611년에 요시히사가 사망하자마자 기슈를 고쿠부 성에 별거시키고, 측실을 8명이나 거느렸다. 이들 측실들과의 사이에서 39세부터 죽을 때까지 33명이나 되는 자녀를 낳았고, 이들의 자녀들을 차례차례 분가의 가독 상속자나 중신들의 양자 또는 아내로 밀어넣어, 자신에게 권력을 집중시키는 데 성공했다.

3. 1. 긍정적 평가

시마즈 요시히로의 셋째 아들로 태어난 다다쓰네는 아버지와 삼촌 시마즈 요시히사처럼 전장에서 용맹함으로 명성을 떨쳤다.[9] 임진왜란정유재란에서 큰 공을 세웠으며,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가문을 보전하고 사쓰마 번의 기반을 다졌다. 1609년에는 류큐 왕국을 정벌하여 번의 세력을 확장하고 중국과의 대외 무역을 활성화했다.[11]

다다쓰네는 내정에도 힘써 번의 통치 체제를 정비하고 경제 발전을 이끌었다. 와카, 렌가, 다도를 즐겼으며, 검술은 도고 헤이쿠라에게서 배웠다고 한다.[9] 가고시마 만의 별명인 킨코만(錦江湾)이라는 명칭은 다다쓰네가 읊은 와카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또한, 사나다 노부시게(유키무라)를 "일본 제일의 병사"라고 평가한 편지를 남긴 것으로도 유명하다.

3. 2. 부정적 평가

다다쓰네는 가신 이주인 타다무네를 살해하는 등 가문 내 권력 투쟁 과정에서 강경한 모습을 보였다.[9] 1609년 류큐 왕국 침공은 제국주의적 침략 행위로 비판받을 수 있다.

정실 부인 가메히사와의 불화도 있었다. 가메히사가 사망했을 때, 다다쓰네는 가메히사 측의 오쿠죠츄에게 다음과 같은 와카를 보냈다.

:"덧없는 세상이여, 가메쥬는 이 음력 10월에 죽어버렸다. 눈물로 소매가 젖을 정도인가, 라고 하면 그 정도는 아니지만"[12]

실제로 아내인 가메히사의 를 세우지 않은 점이나, 후쿠쇼지 터에 있는 시마즈 가문의 역대 묘 중, 다다쓰네/가메히사 부부의 묘만 나란히 있지 않은 점으로 미루어 가메히사와의 불화, 그리고 그녀를 냉대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와카는 "이 눈물에 젖은 소매가, 잘못된 것이었으면 좋았을 텐데"라고 해석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13]

측실 중 한 명의 딸의 생모가 잠복 기리시탄임이 발각되어 타네가시마에 유배되기도 했다.[9]

3. 3. 종합적 평가

시마즈 다다쓰네는 뛰어난 군사적 능력과 정치적 수완을 바탕으로 사쓰마 번의 기틀을 다진 인물이다. 그는 시마즈 씨족의 수장으로서 부패하거나 불충한 가신들을 제거하고 씨족 지도부를 개혁했다. 특히 1599년에는 시마즈 씨족에서 이탈하려던 오랜 가신이자 가로(家老)였던 이주인 타다무네와 그의 아들 이주인 타다자네를 살해하기도 했다.[9] 1609년에는 류큐 왕국을 정복하여 사쓰마 번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중국과의 무역을 증진시켰다.[9] 또한, 와카·렌가·다도를 즐기고 검술에도 능했으며, 가고시마 만의 별명인 킨코만(錦江湾)이라는 명칭은 다다쓰네가 읊은 노래에서 유래했다고 한다.[9]

하지만 그의 통치 방식은 권위주의적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정실 부인과의 사이가 좋지 않아 도쿠가와 다다나가를 양자로 삼으려 했으며, 후계자 문제로 히라타 마스무네를 암살하고 그의 자손들을 몰살하기도 했다.[10] 측실을 여럿 두고 많은 자녀를 낳아 자신의 권력을 집중시키는 데 힘썼다.[11] 류큐 침공과 같은 침략 행위는 비판받을 여지가 있다.

4. 가족 관계

구 분내 용
아버지시마즈 요시히로
어머니지쓰소 부인 - 히로세 스케무네의 양녀, 소노다 지쓰아키의 딸
정실시마즈 가메히사 (1571년 ~ 1630년) - 시마즈 요시히사의 셋째 딸
측실시마즈 다다키요(시마즈 나카이에의 조상, 삿슈가시마즈 요시토라의 셋째 아들, 시마즈 요시히사의 외손)의 딸
자녀
측실가마다 마사시게(하리마노카미)의 딸
자녀
측실사가라 나가야스의 딸
자녀
측실미야하라 가게타쓰의 딸
자녀
측실마키 다네치카의 딸
자녀
측실사키야마 모리히데의 딸
자녀
측실이에무라 시게하루의 딸
자녀
측실가와무라 히데마사의 딸
자녀
측실나가하시 쓰보네 (요네라 아키)
양자


5. 관련 작품

참조

[1] 서적 Japan Encyclopedia https://books.google[...] Harvard University Press 2002
[2] 문서
[3] 서적 豊臣秀吉の朝鮮侵略と民衆 岩波新書
[4] 문서
[5] 문서
[6] 문서
[7] 간행물 大坂冬の陣開戦までの西国大名の動向―黒田長政・島津家久を中心に―
[8] 서적 日本近世武家政権論 日本図書刊行会 2000-10
[9] 서적 島津歴代略記 1986-10
[10] 서적 島津義弘の賭け 中央公論新社 2001-10
[11] 간행물 持明夫人 1965-12
[12] 서적 鹿児島県史料 鹿児島県 1984
[13] 서적 戦国武将の明暗 新潮社 2015-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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